국내 설계자로서 작은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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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골프아이엔씨 작성일 20-10-20 10:10 조회 19,20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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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코스 설계자는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48억 년간 지구가 만들어 놓은 지형을, 인생 100년도 어려운 인간이 설계하고 공사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일이다. 설계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골프코스는 그의 이름을 품고 수백 년을 더 살아간다.

당연히 설계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작업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야 하며 더 나아가 혼을 담아 설계해야 한다. 자칫 한순간의 안일한 생각 때문에 코스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 있으며, 그곳엔 설계자의 이름이 항상 따라다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명실상부한 역사상 최고의 골프코스 설계자는 앨리스터 매켄지다. 그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종군 의사였다. 당시만 해도 부상병과 포로에 대한 정확한 국제적 조약이 없어 부상병 보호는 아군들이 알아서 해야만 했다. 앨리스터 매켄지는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임시 병동을 만들었고, 수시로 이전 작업을 해야 했다. 임시 병동을 만들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할 사항은 병동이 적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연 지형에 가려져 숨어 있을 수 있는 환경이 부상 병동으로는 가장 좋은 위치였다.

전쟁 기간의 이러한 경험은 이후의 골프코스 설계 작업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살아남기 위해 자연과 어울리는 인공 시설물을 만들었던 것이, 자연에 골프코스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작업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사로서 쌓아 온 커리어가 어떻게 세계 최고의 골프코스 설계자로 이어졌는지 궁금해한다. 종군 의사로서 목숨 걸고 자연과 친화되었던 경험이 세상에서 자연과 가장 잘 어우러지는 코스를 만드는 설계자의 근간이 되지 않았을까, 필자는 생각한다.

앨리스터 매켄지가 남긴 코스 중 대표적인 3개 코스는 사이프러스포인트 컨트리클럽(Cypress Point Country Club)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Augusta National Golf Club), 그리고 로열 멜버른 골프클럽(Royal Melbourne Golf Club)이다. 그는 1934년 세상을 떠났는데, 이들 코스는 죽기 직전 수년 동안 만들어진 마스터피스들이다.

하지만 설계자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이들 코스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3명의 설계자가 각각의 코스를 설계했다고 여길 것이다. 3개의 코스가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안가를 따라 듄스 지형에 조성된 사이프러스포인트는 바람에 밀려 올라간 벙커와 모래 둔덕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다. 특히 사이프러스 파인과 벙커는 놀라울 만큼 서로 닮았다. 내륙에 조성된 오거스타 내셔널은 칼로 자른 듯 깔끔한 벙커링과 인공적인 조경이 어우러져 또 다른 그림을 만들어 낸다. 골프의 4대 메이저 대회 중 유일하게 같은 장소에서 개최되며, 협회가 아닌 클럽에서 주최하는 마스터스 대회의 홈 코스이기도 하다. 로열 멜버른은 샌드벨트라는 지명처럼 내륙이지만 해안에 가까운 모래 지형에 조성되었다. 배수가 원활한 지형 특성상 모든 벙커가 아래로 꺼진 듯 움푹 파인 모양을 하고 있다. 플레이 지역과 비관리 지역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호주 코스 고유의 특징을 갖고 있다. 배수가 잘되는 지형이라 폰드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모두 1930~1934년에 만들어진 코스이지만 설계자는 자연환경 조건에 따라 코스의 모습을 달리했다.

물론 이들 3개의 코스는 오픈 당시엔 비슷한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초의 설계를 기반으로 지금까지 변해 온 모습 또한 자연을 따라간 것이다. 골프코스는 주어진 자연환경을 거스르지 못하고 환경에 맞추어 현재의 모습으로 진화되어 왔다. 스포츠 필드 중 유일하게 진화하는 것이 골프코스이다. 성장하는 나무와 잔디, 그리고 발전하는 코스관리 장비와 골프채, 골프공들은 골프코스의 진화를 더욱 재촉한다.

앨리스터 매켄지도 골프코스 설계의 기본 항목 중 하나를, 리노베이션을 염두에 둔 설계라고 강조했다. 진화하는 장비들로 인해 코스 또한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이유다. 하지만 아무리 자연환경이 진화하고 과학이 발전하여 코스의 변화가 필요하더라도 설계자의 최초 설계 철학은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설계자의 이름은 골프코스와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노트북에는 하나의 이메일이 저장되어 있다. 필자에게 설계를 가르치고 한동안 자신의 이름을 앞세워 한국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로빈 넬슨이 보낸 이메일이다. 딱 한 줄의 이메일은 노트북을 열 때마다 나를 지켜보고 있다. “I’ll help you wherever I can.” 이 문구는 항상 내 가슴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로빈은 2012 11 19일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필자에게 보낸 메일은 그가 죽기 일주일 전에 보낸 것이다. 루게릭병은 점점 몸이 굳어 나중에는 움직이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 가는 병이다. 자신을 멘토로 하여 설계의 꿈을 꾸고 있는 제자에게 한 줄의 메일을 보내기 위해 로빈은 얼마나 고생했을까!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나를 도와주겠다는 메일은 데스크톱에서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아무리 간단한 설계 업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며, 항상 로빈이 필자의 설계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모든 설계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제자에게 유언 아닌 유언을 남긴 로빈 넬슨과 함께한다.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골프코스 설계는 그 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설계 철학과 로빈 넬슨이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마음가짐은 필자가 앞으로 골프코스를 설계하는 데 가장 우선하게 될 것이다.

설계자의 전성기는 60세 무렵이라고 한다. 수십 년간 설계와 공사를 경험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코스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앨리스터 매켄지의 3개 코스도 그의 나이 60세 전후로 조성되었다. 필자도 설계자로서 제대로 된 눈을 가지려면 앞으로 10여 년은 더 종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도 항상 로빈과 같이 설계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필자에게도 항상 지켜볼 설계 파트너가 옆에 있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 본다.

Golf Inc. Korea OCT/NOV 2020 Vol.4

_하종두(JDGA 대표이사)